주일설교_불완전한 공동체와 여러 몸들의 식별
성삼후 19주일 설교
대한성공회 남양주 성생원 교회 주일 설교입니다.
주일 설교의 본문
출애 32:1-14 / 시편 106:1-6, 19-23 / 필립 4:1-9 / 마태 22:1-14…
불완전한 공동체의 여정과 여러 몸들의 식별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매일 매일 가을을 한껏 만나게 됩니다. 이제 막 떨어지는 아직은 넉넉한 초록을 품은 나무들에게도 낮의 햇살이 금새 사라지는 시간이 도래했지만 여전히 한 낮의 햇살 아래 포근함 속에서도 가을이 있습니다. 바람이 상쾌하고 하늘이 높고 맑아 잠깐 밖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쉬게 됩니다. 곧 더 앙상해 지는 나무들을 만날 것을 알며 해는 점점 더 짧아지고 바람은 더 세차질 것이지만 지금의 가을은 아주 충만합니다. 그런 시간 속에 마음 한 가득 평화가 샘솟습니다. 이 가을의 평화는 계속 이어질까요.
여전히 공부는 느릿느릿 이어지며, 하려고 하는 일들 가운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일들로 씨름하기 일쑤입니다. 최근에는 한 가지 일을 오래도록 집중하여서 정성스럽게 하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전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던 사회선교현장의 지난 날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람 사이에도 오해를 쌓는 경우도 있어서 인연에 연연하니 사제로서는 어울리지 않지만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가운데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따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바에 대해서 이룬 바는 없지만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또 마음을 읽힐 수 있는 때가 생겨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또 사람 아닌 공간이든 익숙함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가운데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교회는 건물의 교회를 넘어서게 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어떤 교회라는 공간에 나의 삶이 포개지는 가를 바라보면 기쁨이 샘솟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웃은 나를 보는 거울이 되며 내가 가는 길을 밝혀줍니다. 그것이 실수라도 말입니다.
2.
오늘 전례독서를 저는 “기쁨”이라는 주제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각 성경 말씀들은 기쁨이라는 이 주제 아래, 세 가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가야 할 갈등을 마주하게 합니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공동의 삶 가운데 갈등은 빈번하고 쉽게 발생합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속에서도 갈등이 발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랑과 동시에 갈등은 태초부터 존재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쁨에 이를 수 있을까요. 마치 갈등이라고 하는 것, 어떤 ‘문제’로 부르는 상황은 사랑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야훼와 출애굽해 사막을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출애굽 32장은 백성들에게 약속을 확인시켜준 증거판이 막 내려지고 난 후 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이제 막 증거판이 내려졌는때 그 때 불안감을 최고조에 이르러 잘못된 결정을 하니까 말입니다. 어쩐 일인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 올라가 오지 않고 자리를 비웁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론에게 금붙이를 가져옵니다. 그들을 앞장설 금송아지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보다 확실하고 보다 강력해 보이는 상징을 만드는 일에 모든 공동체가 동참합니다. 이를 안 야훼가 진노하게 됩니다. 뒤늦게 나마 이를 알게 된 모세는 대신 용서를 구하고 이로써 화가 누그러지고 용서하게 됩니다.
이 갈등을 통해서 야훼가 바라는 바는 더욱 굳건 해지고 백성들의 잘못된 기도의 방향은 조정이 됩니다. 그리고 모세가 올린 기도 끝에 야훼와의 기억은 그들을 구원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이스라엘을 기억해달라고 합니다. 그 조상은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증거이자 그들이 길 잃고 헤맬지라도 결국 야훼께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이들을 떠올려달라고 하자 야훼의 재앙은 거두어집니다. 이 식별의 과정은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나침반이 됩니다. 야훼의 증거판이 새로워지며 거두지 않는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선명해진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경험, 화해의 경험, 어디에서 근거하여서 이루어졌는 지 보는 바를 아는 것입니다. 이 경험은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를 다르게 이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얻은 것은 기억을 이어가는 경험, 공동체의 방향을 찾아가는 ‘사건’일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주 짙게 내려 야훼의 뜻이 어디있는 가 묻는 데 이정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3.
복음말씀 속에 예수님 이야기를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가지 정도의 측면에서 읽어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는 이 이야기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또 비유를 들어”라고 비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 중에 하나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나서 종교지도자들과 율법학자가 몰려와 예수님에게서 흠결을 찾고자 하는 때입니다. 그에게 내려진 질문은 “당신은 어떤 권한으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인가”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선을 분명하게 긋고 또 맞서는 것 대신에 이 갈등을 다시 질문으로 듣는 이를 초대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비유란 각자가 읽는 상황에 따라서 또 경험에 따라서 다르게 읽힙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알듯 모를 듯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려 거든 씨앗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가능성을 품은 씨앗은 거기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비유는 어느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혼인잔치 속의 주인공은 신랑신부일 법인데 이 이야기 속에 신랑 신부는 없고 임금의 초대와 그를 초대한 사람들이 집중됩니다. 혼인잔치가 열렸다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를 모른척합니다. 자기 바쁜 일 때문인데요. 이들이 너무하기만 합니다.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고 또 초대를 하러 간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처음 초대한 사람들은 올법한 사람들이었고 임금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자기 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잔치에 가지 않습니다. 자기 종까지 죽이니 임금이 몹시 화가 나서 되갚아주고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잔치에 초대합니다. 잔치는 비로소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때 한 사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뒤늦게 쫓겨나게 되는 일까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모두 내 안에서 읽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나는 모두 나 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그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할 때가 있습니다. 진짜가 내가 아닌 그 자리로 초대에 임할 때가 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도 그 자리에 제대로 있지 않은 나입니다. 마땅히 잔치가 열려 초대를 받는다면 그곳에서 가서 혼인을 축하해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는다면 크게 화를 입게 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은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자기 옷 매무새를 갖추고 또 일정을 조율하며 우선순위를 조정할 때 긴장감을 가지게 합니다.
4.
두번째는 또 이야기가 올려진 때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던 사람들, 당대에 권위를 가진 이들, 높은 자리에 올랐던 이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서 성전에서 가르치던 예수 앞에 몰려와 그를 죽일 궁리를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그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삶을 돌이키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연달아 배치된 비유들(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은 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죽일 궁리를 하는 이들에게 예수가 가진 권위로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한 이야기, 그에게 권한을 확인하고자 한 이야기에 정면으로 확인시켜줍니다.
이 갈등의 이야기는 예수의 권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22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는 누구인가요. 어떤 권한으로 당신에게 질문하고 다가오는 지요. 저는 이 질문에 온전히 대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대답에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으로 남을 시기하고 미워했을 때를 떠올리며 내게 당도한 초대에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5.
당신에게 증거판을 내려주었으나 오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을 때 금송아지가 오히려 낫다고 한 적은 없는 지 돌아봅니다. 이러한 고민과 고뇌, 갈등은 결국 빛이신 예수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합니다. 우리를 선택하고 나아가게 하는 초대가 당도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공동체에 내려진 갈등은 식별을 이루게 합니다. 식별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로의 초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같은 색이라고 보여지고 의미없었던 곳에 물이 갈라지고 땅이 생기고 큰 빛으로 낮을 작은 빛으로 밤을 밝히는 시간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잘못은 우리를 배우게 하고 또 돌이키게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를 항상 바른 곳으로 이끌며 더 가까이 이끕니다. 경험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몸으로 배운 것보다 더 깊이 배우는 것은 없습니다.
초대에 응하는 것은 우리를 뜨겁게 만들며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기억은 잊혀지고 끊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는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는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연연하고 또 서툴고 잘 되지 않으며 넘어지고 부딪히는 가운데 그 실패 가운데 우리는 언제든지 새롭게 하는 역사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어떤 권한으로 그 일을 행하라고 따져 묻는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것을 지켜본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 과정 가운데 그를 더욱 굳건히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켜보는 사람들, 지켜보는 제자들 그들에게 말씀으로 배우게 하시는 예수님. 비유로 초대하는 예수님. 그의 지혜로움과 그의 용맹무쌍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6.
무엇이 되려 거든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결국 공동체를 돌이키게 하며 변화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나 빼고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경험이 포함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성경을 읽으며 하나의 예배 속에 있으며 세상으로 동시에 매주일 파송 됩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길이 되어줍니다.
필립비인들에게 편지 끝에 바울로는 유오디아와 신디케, 이 교회를 세우는 데 너무나도 헌신 한 두 여자의 이름을 먼저 부릅니다. 바울로는 그들에게 간청합니다. 한마음이 되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둘이 앞으로 겪게 될 갈등 때문이었을까요. 그리고 이 여자들을 도와주라고 협력자들에게 간청합니다. 그들이 점점 더 커지는 필립비의 교회의 여정 가운데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닥칠 것이라는 것은 바울은 예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필립비교회의 동역자들에게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초대합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도록 말입니다. 이 기쁨은 갈등에 대해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감사로 이 갈등을 이겨내자는 이야기입니다. 기쁨은 함께 이겨냈을 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가 맞이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말씀 속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우리에게 당도한 초대와 우리에게 요청되는 어려움 가운데 길을 발견하는 과정을 서로 지켜보시고 함께 해나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여러분 곁에서 발걸음을 이어가는 사람으로 기도하며 찾아가겠습니다. 각자의 흠결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수는 결국 우리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말입니다. 우리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문제들과 마주한 일들은 결국은 우리의 기도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임을 어떻게 알려줍니다.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삶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슨 저주를 받았다거나 또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평화의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각 삶 가운데 어려운 여정 가운데 힘 내시고 잘 걸어가시기를 이 말씀 가운데 기쁨으로 이르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