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_성삼후13주일
이 설교는 대한성공회 남양주교회(남양주성생원교회) http://fssw.church 성삼후 13주일(연중 22주일) 설교입니다. 가해 독서본문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전례독서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애 3:1-15 / 시편 105:1-6, 23-27, 45 / 로마12:9-21 / 마태 16:21-28…
주일 오전 성찬례 오전 11시에 있습니다. 가구단지 입구(가구단지중앙길 4)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삼후 13주일 설교
그 나무를 만났네.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난 수요일, 네팔과 티베트의 국경에 맞닿은 히말라야에서 거대한 빙하의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얼음과 바위가산 아래로 쏟아졌고, 물과 진흙과 돌이 강을 따라 마을을 덮쳤습니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피해 규모는 지금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이제 어쩔 수 없다. 지구가 끝이다.”는 체념의 이야기로만 읽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빙하 붕괴의 직접 원인은 아직 더 조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가 히말라야의 빙하를 빠르게 녹이고, 높은 산의 얼음과 바위를 붙들고 있던 영구동토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빙하가 왜 녹고 있을까요. 당연히 지구의 온도가 계속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이전보다 1.5도가 오르면 지구의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티핑 포인트를 넘어섰고 이를 돌이키기 위해 여러 방안을 마련하여야 하지만 한국은 아직 적극적인 정책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탄소배출량의 증가에 대책을 세우지 못한 북반구 경제 개발과 속도를 내고 있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지은 죄로 인한 인재는 이 지구의 온도 상승에 더 부채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네팔 한 나라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네팔은 지난 몇 년간 산림을 국유화하여서 보호하고 계속해서 늘려오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배출하는 탄소배출량을 상대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선량하게 산 이들에게 닥친 죄 없는 무수한 네팔과 티베트 국경의 사람들, 자기 땅을 가꾸고 경작하면서 산과 숲을 돌보던 이들의 삶을 기억해봅니다. 그들을 애도하고 추모합니다. 우리의 정치를 우리의 발전을 우리의 윤리를 우리의 삶을 전환해야 합니다. 기후위기의 희생자들을 잊지 말고 우리 삶을 전환하기를 기도해봅니다.
2.
교회에서 기도한다는 일은 이웃의 필요에 더욱 열리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웃은 누구일까요.”
제가 사제가 된 계기는 손데레사 수녀님이 인도하시던 피정에서의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첫 피정 이후로 저는 오랫동안 수녀원 피정을 찾았고, 해마다 참가하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피정에 들어가면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오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말씀이 나를 살리고 나를 새롭게 하는 순간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피정을 마치는 날이면 수녀원을 나오고 싶지 않아집니다. 그곳에서 듣는 기도와 깊이의 맛은 꿀처럼 달아서 그 마음을 내내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로테죌러는 ‘신비와 저항’을 서로 다른 두 길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에게 신비는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물러나는 체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만 붙들려 있던 사람이 고통받는 이웃에게로 나아가게 되는 변화였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세상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민해집ㄴ디ㅏ. 그러므로 깊은 기도는 우리를 세상 밖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고, 다시 세상 속으로 보냅니다.
세상 속에서 나와 살아가야 하는 ‘일상’을 마주합니다. 그 일상 가운데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 “오늘”이며 “지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결국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부르심’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내려진 명령인데 강제한 바가 아니라 거대한 존재, 대타자에 내가 이끌려 그쪽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그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 받은 이들은 결코 주님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길고 멀지만 돌아서서 보면 주님께서 이끌어서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며 고백이 담기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멀리 간듯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의 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우리는 살게 됩니다.
3.
오늘의 말씀 가운데 저는 이 단어를 주목해봅니다. “함께”라는 말.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믿고 또 원주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건물 전체를 원주나눔의집에 빌려주신 분이십니다. 법원 앞에 건물이었다가 법원이 이전하면서 그곳에 있던 사무실들이 옮기게 되면서 그 건물을 선한 이웃이 되어서 내어놓고 싶어하시던 김정삼 변호사님 이셨습니다. 3층 건물이었는데 1층과 3층을 지역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지하를 개조해서 지역사람들을 위한 방음시설을 갖춘 소음방지 음악실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의 리모델링 비용은 신협에서 모아 주셨는데 다 완공되고 나서 그곳에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싶은 지 여쭤보았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틔락’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라면서 골라 주신 성경 구절이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을 골라 주셨습니다.
많은 재산을 벌었지만 김변호사님은 시민연대와 녹색연합, YMCA 등에 건물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법원장을 하셨던 분인데 원주에서 2명 있는 공증변호사 중 한 분이셨습니다. 명성이나 또 많은 돈을 벌었지만 아주 소박하셨고 아주 겸손하셨습니다. 저도 무척 존경했습니다. 제가 원주에서 사역을 마무리할 때 저의 신자가 아니신 데도 저의 마지막 성찬례에 찾아 주셨고 특별히 식사 자리를 마련하시고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이라면서 두 번 째의 삶이 시작될 거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여전히 그 공간을 원주나눔의집에 빌려주고 계십니다. 원주나눔의집은 그곳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진로자립 프로그램과 여성 일자리 사업의 사회적협동조합 등을 추진해보고 펼쳐보고 있습니다.
4.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어라”는 로마서의 말씀은 완전히 이타적인 삶입니다. 곁에 있는 이의 마음이 옮겨 붙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내 마음을 완전히 열어서 다른 이의 마음이 옮겨오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공감이 간혹 ‘-그랬네.’ 같은 어미처리로 설명되어지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마음을 완전히 동화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실제로는 관상 기도 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옆에는 항상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만 열 준비를 하면 주님과 일치가 되는 일입니다. 관상기도 중에 많은 시간을 앉아 있지만 실제로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역동을 잠재우고 흐름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 중 사람들은 보다 잘 먹고 잘 자게 됩니다. 옆에 열려 있다는 것. 바깥에 열려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에 야훼의 첫 마디가 “들어라, 이스라엘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집중을 돌이켜서 공간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나의 일상에서 주님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을 마련하는 일. 이것이 시간으로는 기도 시간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것이 이웃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모세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곳은 호렙산, 도망자를 부르시는 주님은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십니다. 그 소리, 애닯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산 호렙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입니다. 아무 사람도 없고 오직 주님만이 도착한 시간에 당도하여 모세는 대답하게 됩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모세가 “서 잇는 곳”을 축복해주며 다시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거룩한 땅”이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은 스스로를 소개하십니다. 이제 그 조상들의 신, 대면했던 신. 그들을 이끌고 그들 삶의 주인이었던 하느님이 모세의 삶에도 개입하십니다. 도망자 신세인 모세에게 그들을 이끌어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선택하십니다.
5.
모세는 주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나는 나다” 나는 너가 가진 언어 안에는 이름이 없으며 너가 가진 편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두려움 가운데는 없으며 나는 나 스스로 있는 자, 모든 것을 뛰어넘는 존재라고 알려줍니다. 온전히 그렇게 모세와 만납니다. 모세에게 잊을 수 없는 삶을 들려주며 모세를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보내줍니다. 떨기 나무를 본 모세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 나무를 본 모세는 물러서지 않으며 더이상 도망가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사람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실제를 보았고 그 압도당하는 경이로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실재이며 완전한 일입니다. 나는 완전한 순간 변화함을 맞이합니다.
복음서를 들여다봅니다. 복음서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을 자기가 아는 언어 속에 가두어 두고 안전하며 변화하지 않는 곳에 가두어 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고 꾸지람을 듣습니다. (마태오 복음 16장 23절)
떨기나무를 본 모세의 부르심과 묘하게 그 나무 십자가가 겹쳐집니다. 나무 예수님 그곳에 매달렸을 때에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 있게 됩니다. 내 마음의 지옥과 타협을 물리치고 오로지 나를 내어놓는 헌신 속에서 살기를 요청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 가운데 당도합니다.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질문은 우리에게 당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임박했습니다. 도망가고 또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라도 그 떨기나무를 보았다면 그 십자가 나무 아래 서게 되었다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돌아서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울음으로 몸을 돌려봅니다. 우리의 이웃들의 요청에 기꺼이 나의 삶을 봉헌합니다. 멀리 돌아갔지만 이제는 돌아와 함께 있기를 청하는 이웃들에게 삶을 내어줍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부끄럽지만 그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나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을 잃은 줄 알았던 그 날, 그 나무를 만났네.
그 나무 곁에서 나를 기다리시던 하느님을 만났네.
그리고 그 곳에서 울고 있던 이웃을 함께 만났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각주) 티핑포인트(tipping point, 임계점)란 지구의 기후체계가 일정한 한계를 넘은 뒤에는 작은 변화만으로도 급격하고 자기증폭적이며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로 전환되는 지점을 말한다. 빙상 붕괴, 영구동토 해빙, 산호초 생태계의 소멸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1.5도는 모든 체계가 한꺼번에 붕괴하는 절대적 경계선은 아니지만, 이를 초과할수록 여러 티핑포인트를 넘어설 위험이 커진다. 그러므로 1.5도를 일시적으로 넘었다고 해서 대응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며, 온도 상승을 0.1도라도 낮추는 노력은 여전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IPCC, Climate Change 2023: Synthesis Report, Summary for Policymakers; David I. Armstrong McKay et al., “Exceeding 1.5°C Global Warming Could Trigger Multiple Climate Tipping Points,” Science 377, no. 6611 (2022), DOI: 10.1126/science.abn7950.
표지그림 > https://www.artsy.net/artist/honore-sharrer
호노레-샤레, 여자는 들었다.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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