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_연중21주일_성삼후12주일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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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문은 대한성공회남양주성생원교회 연중 21주일(성삼후 12주일) 설교문입니다.

사용한 전례독서는 링크를 통해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seoul.anglican.kr/archives/1184

 

연중21주 (가해) 1

출애 1:8-2:10 / 시편 124 / 로마12:1-8 / 마태 16:13-20…

seoul.anglican.kr

이 글의 앞 부분은 뉴스엔조이 세속성자 주일 예배 안에 ‘말씀 나눔’으로 실렸습니다.

[성령강림절 후 제13주] 한 사람

[편집자 주] 세속성자 주일예배청어람ARMC가 구성한 필진이 교회력에 따라 본문을 선정하고, 묵상을 나누며, 기도 제목을 공유합니다. 연재는 해당 주일 이틀 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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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이야기로 완성하였습니다. 1독서로 출애굽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설교 작성자는 이쁜이 에스더 사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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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한 ‘한 사람’에 관한 본문을 성경에서 마주하니 심드렁한 마음이 듭니다.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입니다. 특별대우는 누군가에게는 은총이지만 나머지에겐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볼 때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주다니 내심 “불공평해”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열쇠라면 하늘나라를 여는 특혜일 텐데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누구누구만 들어가게 해주면 어떻게 하냐는 볼멘 소리가 나올만 합니다. 실제로 이 복음은 많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특별함”을 부여하는 성경구절로 쓰이곤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권력과 횡포에 사용될 수 있어서 조심스럽게 만나야 하는 복음 말씀입니다. 깨어 있지 않다면 이 특별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나야 할까요. 오늘 독서 가운데 답을 찾아봅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진 능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로마 12:3)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합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된 나는 봉헌하여 성사를 완전하게 하며 하느님나라의 일꾼들을 먹이는 데 사용합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준비를 하면 무엇이든 받은 것을 나누면 되기 때문에 더 받거나 더 많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6:51) 결국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여정과 무척 닮아가는 과정인가 봅니다.

2.

그러고 보니, 누군가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큰 선물이 됩니다. 누군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줄 안다면 그 음악은 모두에게 선율과 리듬의 조화로움을 맛보게 할 것입니다. 정원을 돌보는 손길이 탁월한 이들은 때때마다 꽃을 만나게 합니다. 누군가 가르칠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데 사용되어서 배우는 이들을 도울 것입니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지라도 그것을 선물로 누립니다.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로가 되며 꼭 필요한 서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별함은 결국 산 제물이 되기 위한 통로이며 로마서의 표현대로 한 지체로서 몸을 위한 일부분일 뿐입니다.(로마12:4-5)

이런 눈으로 다시 베드로가 맡겨진 열쇠를 보게 됩니다. 열쇠를 가진 베드로는 열쇠를 책임져야 하고 필요한 때 그 열쇠를 사용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킨다는 것은 깨어 있는 일이며 준비하는 일입니다. 노력이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섬기는 사람의 몫이며 그 또한 고된 일입니다. 한 사람에게 내려진 그 직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됩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열쇠를 맡았습니다. 누구라도 하늘나라에 가고 싶거든 그에게 가서 열쇠로 문을 열어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개적으로 공평하게 알려진 일이니 썩 나쁘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베드로는 어수선하고 서툴지만 가장 먼저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모름을 드러내는 데 서슴없습니다. 그러니 열쇠를 담당하는 일, 그 문을 열고 닫는 일도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정직하게 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됩니다. 이보다 마땅한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특권을 독점하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를 주로고백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지위에 오르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여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은총은 나누기 위해 내려지는 것이며 산 제물이 되기 위해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길에 초대된 한 사람입니다. 다시 보니, 우리는 이미 그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말로 떠벌리고 알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몸에서 조용히 배어 나오도록 부름 받은 한 사람 말입니다.

4.

1독서의 긴 이야기 속에서도 이 “한 사람”이 보입니다. 모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돕는 손길입니다. 이름이 적혀진 존재들, 엄마와 누이 또 파라오의 딸과 시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이, 작은 아기가 곧 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을 종살이의 땅에서 데리고 나올 예언자이자,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예언자였던 모세가 나오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 탄생 장면과 아주 유사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왕이 죽이겠다고 하는 어린 사내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의 이름마저 이 기자는 적지 않고, 이름을 또렷이 적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브라였고 또 한 사람은 부아였다.” 각 각 이름 앞에 “한사람”으로 대칭을 이루어줍니다. 이들의 이름의 기록이 아주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이 긴 1독서 끝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로 끝나기 때문에 꼭 이 이름들이 모세의 이름과 정확하게 바로 연결되는 것과 같은 알아차림을 가지게 합니다. 꼭 남겨져야 했던 이 한 단락. 12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모세를 기억할 때 배경이 되어준 이들의 양심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아기가 태어날 때 사내아이들을 살려냅니다. 그 이유를 1독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 아이들을 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출1:17)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서 화를 내고 꾸짖자, 핑계를 댑니다. 지혜롭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산파들을 돌보아 주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자리에서 스스로 뿐 아니라 백성을 지켜낸 이들, 생명을 받아 내는 산파였던 사브라와 브아를 통해서 이 백성의 아기들은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계엄령 때 상부의 명령을 어기며 움직인 군 부대의 군인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12.3 비상계엄 때 계엄군 헬기의 긴급비행 승인을 보류. 거부해 특전사 병력의 국회 진입을 42분간 늦춘 걸로 조사된 김문상 육군 대령, 조성현 대령과 김형기 중령도 시민들 강제 진압을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지탱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발전을 누가 이룩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그것은 한 사람, 깨어 있는 한 사람, 하느님의 사명을 받아서 기도하고 또 분별하며 자기 이득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기꺼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내어 놓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연한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5.

구약학자 김순영은 이 산파들의 행동을 불의한 권력 앞에서 나타난 신앙의 불복종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한 것은 겁에 질려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었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의 어떤 명령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지혜였습니다. 김순영은 이 여성들의 이름은 또렷이 남기고 이집트의 왕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던 사실에 주목합니다. 또 다른 구약학자 나훔 사르나는 이들의 행동을 “도덕적 명령을 지키기 위해 행한 역사상 최초의 시민불복종”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서로 다른 두려움이 나옵니다. 12절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한 나머지”라고 할 때, 히브리어는 ‘바야쿠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어근인 ‘쿠츠’에는 몸서리치고 질색하며 혐오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번성하는 생명을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려움은 혐오가 되었고, 혐오는 억압과 학살의 명령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였다고 할 때는 וַתִּירֶאןָ(바티레나)를 사용합니다. 이 어근은 ‘야레’입니다. 하느님의 권위와 위엄을 인정하여 두려워하고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잠언서에서 말하는 아도나이, 주님을 경외함과 같은 어근을 쓰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

이제 그렇다면 한 사람, 바로 성경은 나의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마태오복음 속에 베드로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으로 읽었던 저의 심드렁한 마음을 거두고 반성하면서 하느님의 선택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오늘 전례독서 본문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한 사람”은 누구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각 한 사람, 나의 이야기로 읽혀져야 합니다. 각자가 요청 받게 되는 책임은 모두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 가졌다면 분명 그것은 산 제물이 되어 벗들에게 내일의 식량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이며,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서에서도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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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그 한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열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하느님나라의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받았고 그것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나요. 잃어버리지는 않았나요.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여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각 여정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어가십시오. 서로의 이야기 강이 이 성생원교회에 흐르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서로는 깊은 위로와 힘을 주고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사 가운데 펼쳐지는 말씀의 전례가 되며 또한 서로가 벗에게 되어주는 양식은 성찬의 전례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완전한 예배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시작되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우리 거룩한 산 제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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