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질지라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성프란시스
남양주성생원교회의 성삼후 10주일 설교문과 설교 방송 올려드립니다.
첨부파일로 듣거나, 팟빵으로 클릭하셔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3319/episodes/25308540
2026 성삼후 10주일 설교
물에 빠질지라도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 주간 뜨겁게 보냈습니다. 저의 사명은 새로운 전환을 사는 복음을 그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성공회의 사제로 역사를 이어 받아서 새로운 복음 해석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 지쳐 울고 있는 이에게 생명과도 같은 말씀으로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간에는 정말 한 주를 불살랐습니다. 교회를 열어 새로운 이들을 맞이하였고 또 풀씨학교에서 우리 교회 아이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교사들의 푸념도 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식사 자리에서 어떤 신자 아닌 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왜 그렇게 사세요. 이유가 있나요” 제 대답은 “예수님 때문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이라고 하는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이들을 초대하고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 많은 아픈 자들 배고픈 자들 마귀 들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나도 그러고 있습니다. 주인된 자만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들 작은 자들 울고 있는 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선언해주니 나도 내 언어로 내 배움으로 내 기도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길에 서 있는데 한 주는 벅찰만큼 정말 뜨거웠습니다. 새 언어는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새로운 언어는 어떻게 뿜어져 나올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낯설음에서 시작됩니다. 낯선 질문과 낯선 이웃에게서 나옵니다. 낯선 행동에서 나오게 됩니다. 낯설음은 설명되지 않고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색을 가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느 한 사람의 익숙한 언어로 소유되지 않기 때문에, 낯선 질문과 낯선 이웃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복음의 각도를 열어줍니다. 각 사람의 삶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 신자가 올 때 총동원하여 그 삶의 소리를 들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면 그 교회는 낯선 이들의 방문으로 새 빛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지난 한 주는 어린이들의 질문과 낯선 이들의 삶이 오히려 저를 붙들어주었고 제가 알던 복음을다시 배우게 했습니다.
#2.
설교가들은 베드로를 두고,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이라면서 그렇게 예수님을 보지 않고 물에 빠졌던 베드로의 행동을 질책하면서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절대로 믿으라”고 이 복음의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물을 걸을 수 없다는 전제가 우리에게는 깔려있습니다. 우리라면 걸어오라는 말에 걸어갈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걸어오라고 하면 걸어오시겠습니까?
마태오복음의 저자는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나오는 이 복음 말씀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기적으로 보여주신 이 대목에 낯선 행동을 추가합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변화무쌍한 한 존재를 소환합니다. 통제 불가능하며 질문 투성이며 대답은 번번히 틀리는 이 인물은 오로지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그 베드로의 돌발 행동은 종종 믿음 없음으로 대비되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는 합니다. 마태오가 담고 싶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전능하심 이었을까요. 베드로와 비교되고 물 위를 건너는 존재를 독보이고 싶어서 였을까요. 아무리 베드로가 그렇다고 한들 우리는 아무리 믿어도 물 위를 건널 수 없는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뜨겁게 기도하면 그 물 위를 건너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밤새 기도하십시오. 쉬지 않고 기도하십시오. 열정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낯선 질문과 행동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친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유령이다”라고 크게 외친 소리는 새벽 네 시입니다. 밤이 가장 깊어지는 시간, 모든 어제의 빛이 소멸하는 시간, 새벽 네 시는 그렇게 찬란히 오염 없는 오늘의 빛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나고 나서 처음 본 존재, 물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본 이들은 다함께 외칩니다. “유령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밖에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는 새 세상으로 초대하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할 때 한 사람을 연결자로 복음서 저자는 초대합니다. 베드로,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하고 소리칩니다. 그 질문은 베드로에게 첫발을 내디디게 합니다. 한발짝이라도 물 위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로 이어지는 두 문장 사이에 적어도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려주십시오, 라고 하며 주님과 대화합니다. 물론 베드로는 주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물 속에 잠겼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느 날 물 속에 잠겼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가 됩니다.
#3.
낯선 구도는 새 이야기를 생성시킵니다. 물 위를 건널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를 보고 건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 땅의 연약한 이들, 또 넘어지는 자들, 그리고 간절한 이들을 소환시킵니다. 이 이야기는 물 위를 건너는 이야기이자 넘어짐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언제나 잘 해내는 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낯선 자에게 당도하는 복음이 됩니다. 로마서의 어느 날과도 같습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어느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만 당도하는 복음인 줄 알았고 높은 어른들이 있을 때는 조용히만 하고 있어야 하며 모름을 고백하면 안되는 줄 알았는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소식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것은 주님과 더 깊이 사귀는 통로이자 기적의 경험이며 다시 태어나는 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 살아갈 뿐이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보고 한발짝 내디디면 비록 물에 빠질지라도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될 뿐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들이 가득한 복음의 소식은 그렇게 우리들의 삶 속에 우리들의 고통 가운데 침투하여서 세례를 내립니다. 연약한 이들에게도 그 소식을 열어줍니다. 1독서의 복음말씀, 잔뜩 옳은 소리로 예언한 엘리야가 쫓기는 자가 되어서 호렙산에 듭니다. 그가 옳은 소리를 하지만 무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엘리아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거센 바람과 지진과 불에도 계시지 않았고, 그 뒤의 언제나 조용하고 여린 소리를 엘리야를 만나며 위로합니다. 그에게 안심을 시켜줍니다. 그리고 힘을 복돋아 주십니다. 엘리야의 호렙산에서 힘을 얻고 엘리사를 세우고 또 자기의 행보를 이어갑니다. 그에게 힘을 주시는 야훼는 그를 다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일 뒤이 엘리야는 그의 예언을 멈추지 않았고 이스라엘에서 모세와 함께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니 그는 주의 변모의 순간에 소환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4.
주제를 조금 전환하여 이 주일의 또 하나의 주제인 ‘평화통일’에 대해서 소개해봅니다. 결국은 평화 통일에대한 주제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대한성공회는 성삼후 10주일 전례독서와 동시에 이번 주일은 평화통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NCCK에 여러 교단들도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평화통일주일이라고 부르는 이번 주일은 8월 15일이 가까워서 입니다. 토요일에는 광복일을 맞이하는데요. 올해로 81년의 광복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또한 이 광복의 시간은 분단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 지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국의 논리 때문이었고 우리를 입맛대로 사용하려고 하는 이들의 합의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갈라져 있고 그것이 너무나 우리의 일상을 굳건히 하고있지만 우리가 어느 날 평화롭게 서로 오갈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맞이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 교류를 멈추지 않고 시도해왔습니다. 주보에 실린 기도문이나 또 평화통일주일은 그런 의미로 삼으면 되겠습니다.
정치적인 합의와 조정은 복잡하고 뭐 나눌 것이 많겠습니다만 오고 갈 수는 있지 않을까요. 다른 나라는 북한으로 스키 여행을 가는 데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 지요. 서로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서로의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을 교회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의 신앙의 선배들은 북한과의 연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땅을 전쟁으로 체제를 안정화 시키려는 합의를 멈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진정으로 평화의 상태가 아니라 휴전 상태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통일’을 이루기는 아마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쟁을 끝낼 수는 있습니다. 전쟁을 끝내는 협정에 합의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전쟁의 무게를 지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해에 무화과나무학교 교재로 평화를 주제로 공과공부를 하고 그것으로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토픽에서 공모한 곳에 작품을 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평화공부방’이기도 합니다.
#5.
교회는 이런 것들이 가능한 공간입니다. 서로의 삶이 얽히는 공간이며 그 사이에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얽힌다는 것은 서로의 잘 모르고 또 잘 안되고 또 그럼에도 여전히 아픈 자국에 주님의 숨결이 들어가는 것을 함께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베드로의 엉뚱한 질문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그러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듯 보입니다. 실상 평화도 이렇게 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일관되고 획일적이고 변화 불가능한 고정불변한 순간이 아니라 두렵지만 넘나듦이 가능한 불완정성의 상태를 맞이할 때가 복음은 더 널리 선포됩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전쟁은 적대시할 대상을 설정해두면 나머지 모든 것을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 유용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계라고 하는 것이 굵어지면 굵어질수록 실제로는 지속불가능한 것들이 많아집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길에 섭시다. 제가 새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 교우들은 알고 계시지요. 함께 책을 읽고 신앙을 새롭게 하고 제 설교를 들으시고 또 질문하고 찾아오시고 배우셔서 함께 성생원교회 신앙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길에 함께 서는 우리들이 됩시다.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물에 빠질지라도 첫 발을 내디뎌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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