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_비유의끝
성삼후 8주일 설교
비유의 끝
(주의 사항 : 끝까지 읽을 것)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 삶의 방향이 바뀐 것은 오동균이라는 사제를 만나면서부터였습니다. 오 신부님은 6월 말일자로 대전교구 청주 산남교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은퇴식이 열릴 때 저는 GFS세계대회 참석차 스리랑카 있어 갈 수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어떻게 할까 하다 오동균 신부님께 추천을 받은 사제들이 모여 작은 예배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 모임의 순서지를 만들고 모이도록 하는데 이 모임의 이름을 무엇으로 적을까 하다가 ‘그 처음'(이 오동균 사제인 사제들)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펠리칸 고급 만년필을 사드리는 것과 ‘선한 능력으로’ 한 곡을 선물했습니다. 노래를 불러 드리고 또 만년필을 선물하는데 공간이 우리의 성직의 길을 응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전교구의 많은 신부님들이 오동균 신부님의 추천으로 신학대학원 성직후보자 과정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성직 후보자를 추천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한 사제가 우스갯 소리로 ‘다산의 신’이라 할 만큼 오동균 신부님이 추천하거나 계기가 된 이들은 다수입니다. 각자 계기는 다르겠지만 오동균 신부님의 여러 삶의 노력에 반하고 또 도전 받기도 하여 성직의 길에 초대받았던 것입니다. 교회현장에서 여러 중요한 자리에 항상 신부님은 앞서 길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생태선교에 여성신학에 또 여성성직의 지원자로 교회의 새로운 표현에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무엇인가에 매력을 느껴서 사셨습니다. 어느 때는 천연염색에 어느 때는 빵에 어느 때는 뜸에 어느 때는 사진에 어느 때는 야생화에 어느 때는 밀농사에 온 마음을 쏟는 신부님과 사모님을 보면 무엇을 보았길래 저 길을 가시나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온전히 투여하는 자세는 제게는 보석처럼 빛나 보였습니다.
2.
그런 모습을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도 만났습니다. 기후정의영화제에 선정작으로 골라지고 있는진재운 감독의 <나무의 노래>입니다. 이 영화는 자신을 ‘나무를 심는 여인’으로만 소개하는 여든여덟 살의 한 여성을 따라갑니다. 언론에는 조선 황실의 마지막 후손으로 소개되었지만,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미국과 니카라과를 오가며 사는 그는 감독에게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마치 찬트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바람 소리 같고 무엇인가 나무에서 꽃이 나오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는 나무가 뿜어내는 산소를 온 세상에 전해지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나무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생명에게 산소를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니카라과에 백만 그루 나무를 심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촬영할 무렵에는 이미 70만에서 80만 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대신 나무를 남기려는 그 사람의 몸짓과 말은 보는 이에게 깊은 평안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아직 보지 못한 숲을 먼저 본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심지 않은 나무와 아직 자라지 않은 숲,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고결한 그 사람의 몸짓과 이야기가 사람에게 평안함을 전해주었습니다. 희망찬 사람들은 확실히 덜 지칩니다. 품은 마음의 우주가 더 넓습니다. 무엇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
무엇인가 노력을 하는 일은 진정 가치롭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 단정할 수 없지만 품은 마음이 다르기에 그 길을 계속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한 노력은 어느 순간 다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작은 실천이 다음을 낳고, 어제의 한 걸음이 오늘의 한 걸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겨자씨를 심는 사람도 그 작은 씨앗 안에 아직 보이지 않는 생명이 들어 있음을 압니다. 겨자씨가 자라는 모습을 본 사람은 다시 겨자씨를 심을 것입니다. 농부는 씨앗을 심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파보거나 때가 되지 않았는데 갈아엎지 않습니다. 과한 영양을 주지도 않습니다. 저절로 길을 내는 씨앗을 심는 것을 할 뿐 그 다음의 노력은 씨앗이 해 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룩을 넣으면 밀가루 서 말이 온 동네를 다 먹일만큼 부푼다는 것을 아는 어느 제빵사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먹일 준비를 합니다. 누룩의 힘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뜻한 화덕에 노릇노릇 그 빵을 구워서 가장 맛있을 떼 나누어 먹도록 합니다. 그 빵을 내 아이에게도 또 이웃 아이에게도 나와 이웃의 엄마에게도 그리고 남으면 먹고도 또 싸주어 오지 못한 이들에게까지 전해줄만큼 부풀어 오릅니다. 그 누룩을 넣어 반죽하는 손길은 힘든 줄 모르고 해 나갑니다. 갓 구워 낸 화덕의 빵을 읽으며 누룩을 밀가루에 넣고 반죽을 할 뿐입니다.
희망 찬 사람들은 더 넓은 마음을 품습니다. 희망은 희망을 낳습니다. 행복한 사제이자 저의 처음이었던 오동균 사제처럼 그리고 또 이름 대신에 나무 이야기를 하는 어떤 여인처럼 삶을 완전하게 전환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발견했던 어떤 희망이었습니다.
어느 밭, 보물이 숨겨진 밭을 본 이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그 밭에 무엇이 나는 지 알기 때문에 자기 전 재산을 다 팔아도 밑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투신이자 또 완전한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지 않아도 아까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끝나는지 아는 이는 그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결국 오늘의 비유들은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갈 것인가, 무엇에 기대어 나의 시간과 삶을 내어놓을 것인가 묻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용하신 방식도 그렇습니다.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울 만큼 짧고 압축적입니다. 짧지만 그 안에는 넓은 여백이 있습니다. 마치 동양화의 획 하나 같습니다. 화가는 선 하나를 긋고 그것을 난초라고 부릅니다. 보는 사람은 그 한 줄의 선 앞에 오래 머뭅니다. 화면을 채우지 않은 여백이 오히려 선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나머지 세계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 중 예수님은 말이 없으시고 오직 골고타 언덕으로만 향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완전히정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오로지 한마디 탄식 속에 우리는 완전히 몰입되는 것은 그의 압축적이면서도 동양화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비유도 그렇습니다. 다시 화자가 아니라 청자에게 그 선택을 돌려주는 일이 그렇습니다. 비유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던지는 방식입니다. 설명하고 결정되어진 말아 아니라 돌려주며 다시 답을 구하도록 하는 일의 선택을 그 삶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로 돌려줍니다.
게다가 직접 화법을 쓰지 않고 오늘처럼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하늘나리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 그것은 오류가 일어날 수 있음에도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을 택하신 방식입니다.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의 경험과 맥락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이런 모험을 하는 예수님 우리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만 그 분의 말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치 압축하고 압축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깊이 있는 말씀과도 같이 그렇게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가능한 무엇인가를 포함한 채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한 단어, 한 문장만이 남겨질 뿐입니다. 압축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이 되는 말씀인 채 우리에게 남겨집니다. 한 알의 겨자씨처럼 한 문장은 사람들에게 삶이 되고 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물려받은 중요한 지혜, 예언, 교육 전통이었고, 예수님은 그 전통을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의 결단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5.
그러면 우리는 복음의 가장 마지막 비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에게 말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의 복음을 깨달았냐고 물으신 다음,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니 다시 율법학자의 비유에 이르게 합니다. 어느 집주인이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꺼내 놓습니다. 어떤 것은 나눠 먹고 어떤 것은 씨앗이 되게 하고 어느 것은 썩지 않고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 곳간을 열면 온 마을의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기에 그래야 또 여러 해를 살아갈 수 있고 자녀들은 놀며 배우며 자랄 수 있기에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슬픈 일을 함께 애도하고 기쁜 일에 잔치를 벌이는 일을 통해서 그 곳간은 다시 차는 것을 아는 어느 집주인처럼, 이제 하늘 나라의 율법을 아는 사람이 선택지는 꺼내 놓는 일에 이르게 합니다.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들는 옛 것을 낡았다고 가벼이 여지기 않으며, 새 것을 낯설다고 거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 옷을 입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적용해보고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쳐서 언제나 새 복음이 되도록 하는 일을 어떤 율법학자가 해 나가는 지 보아라는 질문입니다. 여기까지 이어지는 쉬우면서 무게감있는 이 복음은 성삼후 8주일을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이 복음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을 알려주신 것’과도 일치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풍성한 것이 어떻게 열매맺는 지 아는 것은 그저 작은 것에도 큰 축복이 깃든다는 것이라는 도식으로만 이어지지 않는 풍성한 복음인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13장은 무한한 우주가 펼쳐지는 첫 문이며 그것이 겨자씨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큰 곳간에 도달하게 되는 여정까지 품습니다.
마음 속에서 품어내는 작은 희망은 여기에 도달하게 합니다. 각 사람은 그 작은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깊이 읽어내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한 단어 한 문장 품어내면 이 세계, 우주라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늘 나라라고 부릅니다. 성생원교회 교우들에게도 이 세계의 부르심이 닿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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