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주일 설교: 부르심
#전례력설교
2026 성삼후 1주일 설교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부르심’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부르심으로 가득 채워 있습니다. 부르심의 비유와 또 삶의 여정 가운데 그 뜻을 받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 결국 부르심의 길이었는 줄 알았는데 성경인물들이 가장 자기 다운 모습을 찾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창세기 12장입니다. 아브람이 그 존재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 대목, 이름을 변경하는 대목은 우리에게 아주 강렬한 본문이어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람은 75세의 이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이 나이의 상징처럼 부르심이란 모두에게 균일하고 평평한 모양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언어로 각 사람의 모양과 때와 곳으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또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응답하느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비록 성공일색의 길을 걸어가지 않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답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소명에 대한 부르심이 어느 성직자에게만 들려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부르심은 모든 존재에 당도합니다. 사제 등의 성직자와 수도자 뿐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부르심은 다가옵니다. 또한 온 생명들이 깃들어 있는 모든 꽃들, 저 이름없는 꽃들도 하느님의 뜻을 다하기 위해 아주 작은 봉우리로도 피어납니다. 그 크기나 그 시간은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피어나는 것, 찬미를 올려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할 뿐입니다. 아브람의 75세의 부르심은 그렇게 납득할 수 없는, 도무지 주님의 일을 하기에 적당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당도합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불렀지만 주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12장의 이야기는 어느 영웅에 관한 이야기나 어떤 특정 민족의 구원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 눈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당도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으로 읽어내는 환경주일의 주제에도 잘 어울리는 요청이 담겨있습니다.
우리에게 ‘칼을 쳐서 보습으로’바꾸라는 요청이 당도하였습니다. 전쟁을 일삼는 일을 멈추고 땅을 빼앗고 폭력으로 착취하며 살생하는 일을 멈추라는 요청입니다. 보습은 농사 도구입니다. 옛 사람들은 철이 귀했기 때문에 농사도구를 녹여서 칼을 만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요청은 낭만적인 요청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보다 적극적인 대비를 가르킵니다. 실제로 세상은 칼을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효과를 누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앞으로 우리를 더욱 괴롭힐 전쟁은 먹을 거리와 물에 대한 전쟁일지도 모릅니다. 가자 지구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여성들과 소녀들이 물을 길으러 먼 길을 걸어야 하고 또 그 길에 성폭행을 당하고 납치되기도 합니다. 올해 유래 없이 가장 뜨거울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우리의 농작물이 대지에서 버텨낼까 그것을 수확할 이들은 그것을 거두고 또 판매할 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안전함을 선물해줍니다. 위기를 가까이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곧 기후위기는 농촌 뿐 아니라 도시까지 가장 위험한 순간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1.5를 높이지 않기 위해서 전세계는 우리가 얼마나 얽혀 있는 지 말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남반구에게 닥친 재앙이 아니며 개발도상국에만 처한 위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위기입니다.
몇달을 모아서 467원의 비용을 녹색헌금으로 모아서 내는 제 일상을 보고 기가 막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것 이야말로 어리석게 시간을 소비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에게 이러한 환경에 대한 관심은 많은 부분을 간결하고 또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적어도 467원으로 나무를 한 그루 심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환경과 관련된 일이 결코 쓰레기를 자원으로 전환하는 운동에 그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3.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알고 떠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했던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전 지구적 운동을 홀로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집, 우리의 교회, 우리의 공동체를 전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전 세계는 지금 화석연료를 비확산 조약을 맺는 운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조약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전지구적 운동을 다 완수하지 못하지만 우리 교회를 보다 녹색과 가깝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재생 에너지를 선택하고 재사용의 정책 등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놀랄 만큼 많은 곳곳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은 마태오를 통해 더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세관장이를 부르시는 대목에서 우리는 마태오의 직업에 눈길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부르시는 주님에게 깜짝 놀랍니다. 주님은 그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를 가르치고 그의 집에 가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의 집을 교회로 변화시켰고 그곳에서 복음을 들려주십니다. 그 집은 더 이상 고립된 집이 아니라 복음이 머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4.
마태오라는 세관장이를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더이상 다른 생명을 볼모삼아 나 잘 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이상 뭇 생명을 가꾸고 돌보라는 말씀을 듣지 않고 속도와 경쟁에 매몰되어서 생명을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이웃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가장 바라는 제사라고 하신 바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은 무엇에 해당할까요. 그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때때로 이웃에 범위를 너무 좁게 정하고 울타리를 칩니다. 이웃에 배타적으로 한국인, 인간, 또는 어떤 특정 계층이나 지역민, 이성애자, 비장애인만을 한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일까요. 마태오라고 하는 그 당시의 죄인이었던 이를 제자 삼으신 것처럼 또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경계 너머의 존재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시간이 아닐까요. 그 해답은 그 다음 문단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마태오의 부르심 뒤에는 예수님이 사람을 살린 걸음이 이어집니다. 회당장의 딸에게 가는 길가에 하혈병을 앓는 여인을 살리신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속되다고 하며 지우는 사람, 만날 기회조차 없어서 겨우 손을 뻗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그 여인은 엎드려 있는 존재였습니다. 엎드려 사는 존재들, 우리의 아래에서 우리의 생존을 책임지는 이들 손을 뻗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에서 우리의 이웃을 발견해봅니다. 누워있는 소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고 말해주는 그 아이를 위해서 주님은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일으켜 세우고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통념에 젖어서 안된다고 생각하고 모두 거절하고 사랑하기를 멈추는 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소문으로만 만났던 낙원을 만나고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 지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그 낙원에 따듯한 스프가 있다는 것, 누구라도 초대해서 함께 머물 수 있도록 기회가 당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봅니다. 생명을 사랑하라는 요청, 다른 생명을 제사 바치기 위해 제물 삼고 있지 않은 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5.
우리에게 이웃이 있습니다. 생명을 품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비인간종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또 형체를 갖추지 않은 자원들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돌보는 자연이라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늘 잊은 채 주권자처럼 굴 때 우리는 이웃들을 만날 통로를 점점 잃어갈 것입니다. 생명을 볼모 삼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삶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르심은 우리의 삶을 완성시키며 우리 존재를 완전히 새로운 이로 서게 합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미래 또한 변화시킵니다. 존재가 새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존재의 변화가 우리 가운데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그 순간을 다시 살고자 애쓰는 이들,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 안에서 다시 올려질 자선의 실천을 행할 또 다른 마태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을 기꺼이 내어 이웃을 위해 사용합시다. 우리가 이미 서로의 생명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은 부르심에 응답할 때입니다. 나의 손이 보태지는 곳에 꽃이 피어나기를 사람이 살 수 기회가 이어지기를, 힘든 일 많을 때 그 사이에서 넘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낫게 되는 기적이 이어지는 통로가 열리기를 기도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저 아래에서 우리의 기반이 되어주고 우리의 발판이 되어주는 연약한 이들의 손길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이웃이 있다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하고 그들을 위한 베풂을 위해 주님의 발걸음이 이어졌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당도한 부르심이자 또한 구체적인 실천, “칼을 쳐서 보습으로”만들어 숲을 사람 뿐 아니라 뭇 생명이 살 숲을 가꾸는 일이 되는 일입니다.
그 길에 앞장서는 성생원교회 교우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환경주일설교 #연중10주일설교 #성삼후1주일설교 #창세기12장 #마태오복음9장 #부르심 #칼을쳐서보습으로 #이웃 #동물을바치는제사가아니라이웃에게베푸는자선이다 #누가나의이웃인가 #환경주일 #녹색교회 #남양주성생원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