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_부활 6주일
더듬 더듬 짚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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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6주일 설교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얼마나 가까이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얻는 시간이 부활절기입니다. 신비롭게도 이 느낌은 직접 만날 수 없는 제자들을 통해서 부활 직후의 그들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가까움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점점 더 뒤로 가는 영화처럼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 제자들이 이 감각, 잃어버렸으나 또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게 됩니다.
부활하심은 결국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자 제자들의 삶의 변화로 서툴더라도 찾아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제자들이 경험했던 기억 속에서 그 가능성을 찾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찾는 도전 속에서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들이 제자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존재에 대해서 가장 절실하게 깨닫는 때가 바로 부활절기입니다. 그래서 한 없이 기쁘면서 또 한없이 고요한 시간이 부활절기이기도 합니다. 원래 숙제 끝내고 난 뒤에는 한없이 여유로운 법이니까요. 주님의 부활의 때가 왜 무덤가였는 지 잘 알게 되기도 합니다. 거듭남 다시 태어나는 일은 지금의 상태의 마지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지금 하던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덤가를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으며 어떤 흔적도 찾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부활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마저 누군가의 재빠름으로 붙잡거나 누군가의 역량으로 소유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릇 일러스트. at Pinterest
2.
내 모양으로 가두지 않는 일, 깨달음을 나의 작은 그릇에 가두어 두려고 하면 그릇 탓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우리는 그 안에 진리에 대해 잣대로 재기 일쑤 입니다. 부활절기에 발견하는 선물은 그릇의 모양을 잃어버리는 과정, 진리를 획일화하지 않고 때때마다 곳곳마다 새로운 언어로 노래 부르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 태국공동체 이주민들이 느티나무 그늘 옆에서 한 참 논다.
제 방 창가에 느티나무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가지가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데 아무도 없을 때 그 소리가 좋아서 한참 제 자리에서 앉아 그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은 원래 소리 없는 데 나무를 흔드니 비로소 소리를 가집니다.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때 투과되는 빛이 때때마다 다른 방향으로 비추어 오니 반짝이는 햇볕이 창가를 장식합니다. 바람을 맞은 느티나무는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흔들려 소리를 갖추고 흔들려 반짝입니다. 바람과 느티나무는 서로가 불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주함이 서로에게는 다른 모습을 맞이하게 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바람은 가던 길을 가다가 나무를 만났고 나무는 자라는 데로 있다가 바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라면 맞이하는 그대로 존재를 내어 맡기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요.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부활을 생생히 새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3.
사도행전에 17장은 앞쪽에는 신전이 가득한 시내에 도착하고 난 직후의 바울로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바울로는 아테네에 가득한 시내에서 우상들을 가득한 모습에 격분합니다. 신을 모신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과 책에만 있는 여러 철학들이 답답하게만 느껴져서 였을까요. 격분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신전들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고스란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머물면서 여러 철학자들과 또 많은 이들과 열정적으로 토론을 이어갑니다.
그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게 됩니다. 아레오파고는 ‘아레스의 언덕, 말스의 언덕(Mars Hill)’이라는 뜻이고 아테네 최고 재판 심의 기관의 이름이었습니다. 살인 사건 같은 중대 재판을 담당한 후에는 철학, 종교, 도덕 문제까지 감독하는 권위를 지녔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이나 사상이나 이 도시에 유해한지를 검토하는 역할을 하는 법정이었습니다.

1515년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린 아레오파고스에서 연설하는 사도 바울로
at. wikipedia
아레오파고 법정은 아테네가 가진 도시안에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철학의 다양한 격돌이 일어났습니다. 바울로는 이곳에서 여러 철학자들 앞에서 그들이 가진 생각들 속을 헤집고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던 바울로가 하느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 더듬 짚으며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짚는 것은 잘 보이지 않을 때 나오는 동작입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 때 앞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 이 짚어 찾는 일은 일어납니다. 원어도 그런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ψηλαφάω (프셀라파오)라고 말하는 이 헬라어 단어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찾거나 만져가며 탐색하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감각할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해서 소환하는 일로 그들에게 판결을 기다렸습니다. 신전을 짓고 이름도 모르는 신을 모실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 삶 가까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소환합니다.
‘프셀라파오’라는 헬라어가 바울로의 단어 중에 있었던 것은 그의 유대교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서에서는 더듬어 찾는 바, 욥기서에 ‘대낮에도 어둠에 싸여 한낮을 밤중인 양 더듬거린다네’라고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하느님을 찾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말해주는 루가복음 24장의 39절 “내 손과 발을 만져보아라”라고 말해주시는 단어도 같은 단어)
4.
이곳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던 플라톤 철학은 이와는 아주 다르게 설명해왔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데아’라고 하는 진리, 본연의 모습의 그림자격이며 실재로는 이데아에 있다는 것, 이곳은 캄캄한 동굴에 빛이 하나 들어와 벽에 그림자가 비추면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림자라는 것, 그러니 감각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그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했고 이 사상은 수많은 후세대 철학들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곳에서 바울로는 감각, 지금 짚으며 찾는 바, 찾고 구하는 바로서의 주님을 만나게 한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선별한 단어. ‘프셀라파오’. 간절히 하느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고른 그 단어가 매료됩니다.
바울로가 그들에게 격분하는 것 대신에 그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들어가 다른 바를 알려주는 정성스러운 그 연설 속에 끝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바울로가 법정에서 나오자 몇몇 사람이 바울로 편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레오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하여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더 있었다’라고 말입니다.
5.
복음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협조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실질적으로는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 데 그것은 더 이상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대변자, 옆에서 응원하고 나를 대신해서 말씀을 전해주는 자, 라틴어의 어원으로는 advocate라고 하는 찾아갈 수 있는데요. 실제로 변호사라고 말해주십니다. 나를 대변해주시는 분, 내 마음을 아시는 분, 나의 모든 입장을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 주시는 분, 나의 억울함을 들어 주시는 분이 오실 것이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런 분이시라고 원어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랬는데 나 대신에 이제 성령님을 보내고 또 성령님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라고 전해주고 계십니다. 영원히 내 안에서 나의 억울함을 덜어 주시고 나의 때때마다 곳곳마다 만나 주시며 나의 사소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떠나지 않으시고 알려 주시겠다고 하시는 그 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성령비둘기. 프랑스 국립박물관. 라틴 747
예수님의 계명을 알고 지키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며 그런 이들에게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진리의 퓨뉴마, 진리의 영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영, 이를 성령, 거룩한 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영은 나를 날마다 깨닫게 하고 나의 일상 속에서 만나 주시며 나의 기도 가운데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6.
우리는 주님을 가까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이 직접 감각하고 또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나의 고민, 나의 걱정, 나의 어려움 가운데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에게서 출발한 고민이 제자의 길에 닿게 되고 제자의 부르심에 닿게 되는 여정이 부활의 시간입니다. 제자에게 전한 말이 나의 말이 되는 시간이어서 내가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 자유한 상태, 너에게서 나를 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 이 시간인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대변해주십니다. 영원히 그렇게 할 거룩한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손을 내밀어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고, 상처 난 몸을 붙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짚으며 만져가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주님은 이미 와 계십니다.
그러니 부활은 멀리 있는 신비가 아닙니다. 지금 나의 삶 속에서, 나의 관계 속에서, 나의 기도와 눈물과 떨림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주님의 현존입니다. 완전히 붙잡을 수는 없어도 분명히 가까이 계신 분,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분, 그분을 더듬어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숨 쉬시며 우리를 진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붙잡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더듬 더듬 짚으며 손끝으로 찾으면 됩니다. 그 손끝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들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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